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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름 "과거 얘기는 그만..선수로서 좋은 모습만 보여줄래"

[스포츠서울 | 김경무전문기자] “과거에 대해 더는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앞으로 선수로서 좋은 모습, 좋은 경기 보여 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열심히 응원해주세요.” 제103회 전국동계체육대회 마지막날인 지난달 28일. 서울 송파구 법원로에 있는 그의 매니지먼트 회사(스포츠 인텔리전스그룹) 사무실에 만난 김보름(29·강원도청)의 얼굴에는 화사한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2.4~2.20)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다른 국가대표 선수들과 달리 기꺼이 동계체전에 출전했던 김보름은 3관왕(여자 1500m, 3000m, 팀추월)에 등극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한껏 드높였다. 코로나-19로 2년 만에야 다시 열린 동계체전. 재작년에 이어 그는 3개의 금메달을 휩쓸며 스피드스케이팅 중장거리 여자부 국내 최강임을 다시한번 입증했다. 김보름이 지난 2월19일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매스스타트 여자 결승에서 곡선 주로를 돌고 있다. 베이징|연합뉴스 올림픽 뒤 바로 동계체전에 출전해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김보름은 “올림픽 때 응원을 많이 받았다. 국내 경기에서 좋은 모습 보여드리고 싶었다. 응원받은 만큼 힘이 됐다”고 했다. 4년 전, 그에게는 너무 황당했던 ‘왕따 주행’ 논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세월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국가대표 선수생활은 계속했으나 정신적 치료까지 받아야 했다. 이후 문화체육관광부 감사 결과, 평창올림픽 팀추월 여자부 쿼터파이널 경기 때 함께 경기를 한 국가대표팀 선배 노선영에 대한 “왕따 주행은 없었다”는 결론이 났지만, 그래도 여전히 씻어내지 못하는 앙금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김보름은 ‘노선영에게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했다’며 지난 2020년 11월 2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기 이르렀고, 이번 베이징올림픽 기간 중인 지난달 16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36부(부장판사 황순현) 판결로 일부 승소 판결을 받기에 이르렀다. 법원은 노선영이 김보름한테 “300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판결을 내렸고, 왕따 주행은 사실이 아님을 다시 확인시켜줬다. 이런 판결이 나오자 김보름은 SNS를 통해 “2018년 2월24일. 그 이후 정말 많이 힘들었고 포기하고 싶었다. 제일 힘들었던 건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뀐 채 거짓이 진실이 되고 진실이 거짓되는 상황에서 재판을 시작하게 됐고, 그날 경기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음이 이제야 밝혀지게 됐다”고 반겼다. 고통의 터널을 빠져 나온 김보름은 이후 잃어버렸던 웃음도 되찾았다. 지난 2월19일 팀 추월 여자부 결승까지 올랐으나 6위로 메달권에는 들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은메달을 땄던 평창 때보다 더 기쁘다”고 말한 바 있다. 김보름이 스포츠서울 독자를 위해 해준 친필사인 김보름은 ‘국민들의 시선이 달라졌음을 느끼냐’는 물음에 “올림픽에서 돌아오자마자 경기에 출전하게 됐고, 집과 경기장만 오가서 느낄 수는 없었다. 하지만 10명이 넘는 팬들이 체전이 열린 태릉스케이팅 경기장을 방문해 응원을 해줘 힘이 났다”고 했다. 법원 판결을 알게 된 순간에 대해 김보름은 “그렇게 4년이 지났는데, 이제서라도 많은 사람들이 어떤 게 진실인지 알게 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노선영이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한 것에 대해선 “진실은 정해져 있다”고 짧게 말했다. 베이징올림픽 기간 중, 애초 김보름의 노선영에 대한 왕따 주행 논란을 일으킨 한 방송사의 아나운서와 해설위원에 대해 팬들이 공개 사과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김보름은 이에 대한 물음에는 답하지 않고 그저 웃기만 했다. 인터뷰에 배석한 김동욱 스포츠 인텔리전스 대표는 ‘그날의 진실’에 대해 “우리도 잘 모르겠다. 당시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가 그랬던 것 같다”고 거들었다. 올림픽 기간 김보름이 그동안의 스트레스로 머리카락이 많이 빠졌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에 대해 그는 “그 정도는 아니다. 보통 여자들이 빠지는 정도”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김보름은 한국 나이로 30살이다. 4년 뒤 열리는 2026 밀라노 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에 도전할 것인가가 궁금하다. 그는 “운동선수는 나이도 나이인데, 몸관리 부분에서는 자신이 있다. 아직 4년이 남아 있고, 많은 시합과 여러 시즌이 있다”며 “한해 한해 집중하고 싶다”고 두루뭉술하게 답했다. 특별한 취미없이 운동과 집 밖에 모른다는 김보름. 자동차, 특히 스포츠카를 좋아한다는 그는 “사람 김보름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게 쉴 때 방송에 출연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고 소망을 밝혔다. kkm100@sportsseoul.com

2022.03.22

‘야잘잘’ 이론 다시 증명하나… 이래서 미국 갔었다, SSG도 궁금하다

[스포티비뉴스=서귀포, 김태우 기자] 이제 투수가 아닌 타자로 다시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하재훈(32·SSG)은 팀의 좌익수 경쟁에 뛰어들었다는 취재진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하재훈은 “나는 뒤에서 따라가는 선수”라고 했다. 일단 자기 것이 완성되어야 그때부터 경쟁에 나설 수 있다고 몸을 낮췄다. 사실 1군 캠프 명단에 넣었을 때도 그렇게 큰 기대치는 없었다. “야수로 뛰는 건 보지 못했으니 일단 어떻게 하는지, 어떤 기량을 가지고 있는지 한 번 보자”는 의도가 강했다. 하재훈 스스로도 캠프에 그렇게 거창한 기대를 가지고 온 건 아니었다. 투수와 야수는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를 뿐만 아니라 쓰는 근육부터 생각까지 모든 게 다르다. 야수로서의 감각을 깨우는 게 우선이었다.  그런데 SSG의 시선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캠프가 계속 진행되면서 하재훈이 원초적으로 ‘가진 것’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모두 사라졌다. 이게 경기에서 어떻게 발산되느냐가 관건일 뿐이다.  구단 관계자들은 “가지고 있는 재능만 놓고 보면 팀 내 야수 중 최정상급이다. 성격도 역시 투수보다는 야수에 맞는다”고 입을 모은다. 우선 잘 뛴다. 그리고 힘도 있다. 탄력이 붙으면 충분히 빠른 발이고, 타구 속도는 ‘OPS 1위 팀’인 SSG에서도 상위권이다. 타자로서 3년 정도 공백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 놀라운 일이다. 좌익수 경쟁을 하고 있지만, 수비 범위를 보면 중견수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오히려 타구의 난이도를 고려할 때 초반에는 중견수 수비가 더 쉬울 수도 있다는 의견이다. 시속 150㎞를 던졌던 선수의 어깨를 의심하는 건 이상한 일이다. 그만큼 수비에서는 인상적인 평가를 받았다. 하재훈도 “처음에는 뛸 수 있다고,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몸이 못 따라갔다”면서도 “지금은 생각과 몸의 차이가 줄어들었다”고 적응 단계를 설명했다. 타격도 적어도 힘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방망이에 맞는 타구에 힘이 있었다. 실전에 들어가서 어떤 모습을 보일지는 지켜봐야겠지만, 감각이 다 올라온 뒤의 모습에는 충분한 기대가 모인다. 발이 빠르기에 2루타 이상의 장타를 많이 만들어낼 수 있는 유형이다. 사실 하재훈은 투수보다 야수로서의 가능성을 더 높게 평가받은 선수였다. 고교 졸업 후 미국에 간 것도 ‘야수’로 갔다. 심지어 해외파 트라이아웃 때도 그는 야수로 테스트를 받았다. 비록 부상이 많아 뜻을 피지는 못했지만, 하재훈 또한 투수보다는 야수 쪽에 더 자신이 있다.  성실한 훈련 태도와 실전에서의 성과를 인정받아 캠프 최우수선수(MVP)에도 선정됐다. 이제 남은 건 연습경기와 시범경기에서 코칭스태프의 눈도장을 받는 것이다. 공백을 무시할 수 없기에 한동안은 고전도 예상할 수 있다. 구단에서도 “빠른 공은 잘칠 것 같다. 다만 변화구 대처 능력은 봐야 한다”고 전망한다. 그러나 예상보다 빨리 야수의 감, 그리고 야수의 세포를 찾고 있는 건 분명하다. 하재훈이 올해, 그리고 내년에 야수로 어떤 활약을 펼칠지는 구단도 궁금해하고 있다.  출처 : SPOTV NEWS(https://www.spotvnews.co.kr)

2022.03.04

“아픈 흔적 평생 남겠지만…” 그래도 김보름의 상처는 잘 아물고 있다.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김보름 선수가 24일 오전 경기도 별내의 한 카페에서 지난 4년간의 심경과 앞으로의 포부 등을 이야기 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또렷하다.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팀추월 8강전에서 한 선수가 뒤쳐진 채 두 선수만 빠르게 결승선을 통과하자 ’왕따 주행’ 논란이 일었다. 해프닝 같던 사안은 김보름 선수가 피식 웃는 듯한 표정을 짓고 방송사 중계진이 “절대 일어나선 안 될 일”이라고 말하면서 엄청난 국민적 비난을 받는 사건으로 떠올랐다. 김보름·박지우 두 선수의 국가대표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는 청와대 청원엔 순식간에 60만명 이상이 동참했다. 그 직후 메스스타트 종목에서 은메달을 딴 김보름은 눈물을 흘리며 빙판 위에서 큰절을 했지만, 들끓는 비난 여론을 잠재울 순 없었다. 4년 뒤 상황은 극적으로 달라졌다. 베이징 올림픽 기간인 2월16일 김보름이 노선영 선수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 1심에서 일부 승소하자 여론은 180도 바뀌었다. 메스스타트에서 5위를 한 뒤 김 선수는 취재진에게 “메달 땄을 때보다 지금이 더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여론’이란 이름의 대중 정서가 한 사람을 어떻게 수렁으로 밀어넣는지, 또 얼마나 손쉽게 바뀔 수 있는지 보여줬다. 비슷한 여론몰이는 지금도 계속된다. 우리는 운동선수나 연예인, 정치인, 심지어 일반인까지 한두개의 파편화된 모습을 근거로 야수처럼 공격하고 비난하고 벼랑 끝까지 모는 데 익숙해져 있다. 이런 시대에 포기하거나 숨지 않고 끝까지 스케이트를 타서 부활한 김보름 선수를 보는 건 놀라운 일이다. 지난 24일 오전 태릉선수촌이 가까운 경기 별내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베이징에서 돌아온 뒤 쉬지도 못하고 다음날(25일) 시작하는 전국동계체전을 위해 김보름 선수는 아침 일찍부터 운동을 하고 카페에 들어섰다. ― 평창의 억울함이 풀리는 데 꼬박 4년이 걸렸습니다. 노선영 선수에 대한 손해배상소송을 시작한 건 2020년 11월이니까, 평창올림픽이 끝나고도 2년이 훨씬 지난 시점입니다. 왜 이렇게 늦게 소송할 결심을 하게된 겁니까? “조금, 약간 시간이 지나면 그래도 제가 좀 괜찮아질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도 너무 힘들더라고요. 늦었지만 이제라도 한번 소송을 해야겠다, 너무 괴로웠던 시간들이어서, 그래서 그때(2020년 11월) 시작하게 됐어요.”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 베이징올림픽에 참가할 때 지금과 같은 극적인 여론의 변화가 있으리라 기대를 좀 했습니까? 기자회견에서 ‘아무도 나를 응원해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걱정을 했다’고 말했는데, 만약 여론이 여전히 냉담했다면 어떻게 하려고 했습니까? “사실 그런 기대를 했다기보다는 그냥 ‘올림픽에 집중해야겠다’라고 일단은 생각했어요. 다행히 그 시기에 법원 판결이 나오게 되면서 많은 분들이 응원을 해주셨는데, 그런 부분에 대해선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리고 아마 그렇지 않았다면(여론이 계속 냉담했다면) 제가 할 수 있는 거는 다 했으니까 베이징올림픽이 마지막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좀 했습니다.” ― 이번 올림픽이 선수로서 참가하는 마지막일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서 베이징에 간 겁니까? “예, 그렇습니다. 이제는 좀 내려놓자, 뭐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베이징이 마지막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습니까? 조금 더 선수로 열심히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까? “그렇죠. 아무래도 일단 좀 힘이 나니까요.” ―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을 보니까, 평창 올림픽 때는 정말 열심히 준비했던 거 같습니다. ‘죽기살기가 아니라 죽어보자고 마음 먹고 준비를 했다’고 썼는데, 그에 비하면 지난 4년의 시간은 너무 힘들었으니까 베이징올림픽 준비는 평창 때에 비해선 조금 아쉬웠다는 생각을 하나요? “아무래도 그렇죠. 준비하는 4년이라는 시간과 과정이, 평창 올림픽 이후에 4년이라는 그 과정의 시간이 힘들었던 시간이었기 때문에, 준비라든가 그런 부분이 좀 아쉽기는 하죠. 코로나로 인해서 국제대회 참가도 거의 하지 못했고요. 유럽 선수들은 코로나 시기에도 유럽에서 열리는 월드컵에 계속 참가하며 실전 경험을 쌓았는데 저는 지난해 말에 단 한차례 월드컵에 나갔거든요.”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 2018년 평창 올림픽이 끝나고 몇개월 뒤 그 사건에 대한 문화체육관광부 특별감사가 있었고, 거기서 이미 ‘왕따 주행은 없었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김보름 선수는 다시 국가대표로 발탁이 됐고요. 그런데 대중의 인식이 완전히 바뀐 건 최근 1심 판결이 나오면서입니다. 오래전에 진실이 드러났는데도 사람들은 왜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을까요? 있는 그대로 사실을 보지 않는 세상이 좀 야속하지는 않았습니까? “평창올림픽이 끝나고서 이제 저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이슈들이 있었고, 또 저에 대한 문화체육부 감사 결과가 나왔을 때는 시간이 좀 지난 상태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도 적었을 때고, 그렇게 제 이슈가 다른 이슈에 묻혔던 거 같아요. 그래도 감사 결과가 제대로 나왔기 때문에, 일단 결과가 중요한 것이니까 뭐 아쉽다는 생각보다는 다행이라고 생각했고요, 그래도 더 많은 사람들이 조금은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습니다.” ― 그때 좀 아쉽기는 하지만 언제가는 많은 사람이 진실을 알아줄 거라는 믿음은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거짓 속에 진실이 묻혀 있었던 것이니까, 또 제가 모든 사실을 다 얘기할 수 있는 상황이 앞으로 있을 것이라고 믿었으니까, 언젠가는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줄 날이 올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 최근에 온라인에서 김보름 선수 머리숱이 많이 빠졌다는 기사와 사진을 봤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까? 그건 스트레스 때문에 그런 건가요? “저도 그 기사와 사진을 봤는데, 그게 좀 빛도 그렇고 사진을 찍은 각도 때문에 그렇게 나온 것이지 특별히 걱정할 만한 상황은 아닙니다. 심하게 걱정할 정도로 머리카락이 빠지거나 하는 건 아닙니다.”(웃음)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 평창 때는 노란색으로 염색한 머리가 트레이드마크였는데, 그 뒤로는 염색한 모습을 보지 못한 거 같습니다. 그때 노란색으로 염색한 건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겁니까? “제가 평창올림픽 전에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적이 있습니다. 그때 염색을 했었는데, 그걸 보고 기자 분들이 ‘금메달 따려고 금색으로 염색을 했다’고 써주셨어요. 그래서 평창에서도 금메달을 꼭 따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염색을 했던 겁니다.”   김보름 선수는 1심 재판결과가 나온 2월16일, 베이징에서 인스타그램에 이런 글을 올렸다. “모두에겐 지나간 일이겠지만 나는 아직도 그 시간 속에 머물러 있었다. 그때의 그 아픈 감정은 세상 어떤 단어로도 표현이 안될 만큼 힘들었고 고통스러웠다. 공황장애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경기 트라우마까지 생겨 아직도 시합 전에 약을 먹지 않으면 경기를 할 수가 없다.” ― 그런 힘든 시간을 견뎌내고 다시 빙판 위에 선 건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요? 어떻게 그런 어려운 시기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겁니까? “사실은 저도 너무너무 포기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스케이트가 좋았던 것 같아요. 그게 저한테는 가장 컸고, 그리고 제가 몸이 너무 안 좋아져서 평창올림픽 끝나고 한 6~7개월 정도 운동을 못 했거든요. 그때 스케이트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아, 이제는 그만둬야 하나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정말 그만둘까, 그런데 그런 상황이 되니까 앞으로 스케이트를 타지 못한다는 생각이 더 괴롭고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된 거 같아요. 사실 처음에는 너무 힘들었어요. 스케이트장 가는 것조차도 너무 힘들었고…. 제가 반년 넘게 운동을 쉬었기 때문에 일단은 스케이트장부터 한번 가보자, 그렇게 시작을 했어요. 처음에는 정말 스케이트장에 가서 빙판만 쳐다보다가 돌아왔어요, 그러고 나서 스케이트를 신고 서보기도 하고, 그렇게 한발짝 한발짝 시작을 했던 거 같아요.”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 스케이트는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타게된 겁니까? 스케이트를 타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언제입니까? “대구에서 초등학교 5학년 때 현장 학습으로 스케이트장에 놀러간 적이 있어요. 그때 처음으로 타봤는데 너무 재밌더라고요. 그래서 집에 와서 엄마한테 스케이트 배워보고 싶다고 얘기를 했고 그렇게 시작하게 됐어요. 또래들보다는 몇년 정도 늦게 시작을 한 거죠.” ― 스케이트를 타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을 꼽는다면, 언제입니까? “기뻤던 순간은…, 글쎄요, 사실 지금도 제 스케이트 인생은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에 가장 기뻤던 순간은 제가 정말 은퇴를 하게될 때 그때 꼽을래요.” ― 김보름 선수의 정신력이 강하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멘탈이 강하다고 스스로도 생각합니까? “일단 제가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을 좀 많이 해요. 스스로 그렇게 생각을 많이 합니다. 제가 스케이트 타기 전에는 태권도를 했거든요. 태권도 선수를 하려고 한 건 아니고, 어릴 때 태권도 많이 배우잖아요, 저도 취미로 배운 건데, 너무 재밌고 좋아서 학교 끝나면 태권도장에서 밤 10시까지 혼자 연습하고 그랬어요. 온전히 제가 하고 싶고 좋았기 때문에, 그리고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에 그런 건데, 어렸을 때부터 그런 게 좀 있었던 거 같아요.” ― 4년 전에 김보름 선수를 비난했던 여론이 지금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혹시 이런 따뜻한 여론이 언제 다시 바뀔지 모른다는 걱정이나 두려움은 없습니까? “그런 거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지난 4년 동안의 시간이 너무 아팠기 때문에 지금은 그냥 좋은 것만 생각하고 싶어요.” ― 누가 가장 고마웠습니까? 어머니입니까? “가장 힘들 때 엄마가 이것저것 좋은 얘기를 많이 해주셔서 제일 힘이 많이 났죠. 엄마가 그냥 한마디를 해줘도 위로가 되니까. 나를 가장 격려해주고 일으켰던 사람이 엄마니까, 엄마와 가족을 꼽을래요.” ― 베이징에서 돌아와서 어머니와 만나선 어떤 얘기를 했습니까? “전국체전 출전 때문에 아직 (대구에 계신) 부모님을 만나지 못했어요. 짧게 전화 통화만 했습니다. 그냥 고생했다, 고생했다는 말만 하셨어요.”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 개인적으로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은 2018년 메스스타트 종목에서 은메달을 따고서도 울면서 빙상에서 큰절을 하는 모습입니다.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에 그걸 즐기지 못하고 오히려 죄송하다고 말해야 하는 마음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심정이 어땠습니까? “그때는 저도 정말 운동을 하면서, 올림픽 메달을 꿈꾸면서, 정말 인생을 걸고 운동을 했고 그 꿈을 이루는 순간이었는데, 사실 웃지 못했다는 게 저한테도 너무 아쉬운 부분이에요. 요즘도 가끔 사진첩을 보면 그때 웃고 있는 사진이 하나도 없어서 너무 안타깝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베이징올림픽에선 메달을 따서 시상대에서 맘껏 웃고 싶었는데…, 그러지를 못해서 정말 아쉽다는 생각입니다.” ― 그때 팀추월 경기를 함께 했던 박지우 선수 역시 상처가 컸을 텐데, 베이징올림픽에 같이 참가했죠? 이번에 둘이서 어떤 얘기를 했습니까? “일단은 올림픽이 가장 중요하고 시합이 중요하니까 그냥 경기에 집중하려고 서로 노력했고 경기 얘기만 했어요. 지나간 얘기는 잘 안 합니다.” ― 평창올림픽 이전에 김보름 선수의 꿈 또는 최종적인 목표는 무엇이었습니까?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 일 때문에 꿈이나 목표가 바뀌었습니까? “평창올림픽 전에는 올림픽 금메달 따는 게 제 꿈이었죠. 그때 메스스타트에서 은메달을 땄으니까, (만약 그 일이 없었다면) 당연히 이번 베이징에서 금메달을 따는 게 제 목표가 됐겠죠. 운동선수로서 스케이트를 평생 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흔히 전성기라고 하죠, 그런 시간이 있다고 생각해요, 저로선 그게 평창 때였던 거고, 그때 금메달을 따지 못했어도 4년 동안 조금은 더 좋은 환경과 상황에서 베이징올림픽을 준비할 수 있었을 거 같아요. 그런 게 아쉽죠.” ― 지난 4년은 그랬지만 이제는 좋은 환경과 분위기가 만들어진 거니까, 4년 뒤 밀라노 올림픽에 다시 나가서 메달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까? “지금은 정확하게 말씀드릴 순 없고요, 제가 4년 전엔 더이상 스케이트를 못 타겠다, 그만둬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지금 베이징올림픽에 나갔거든요. 메달을 따지는 못했지만 5위라는 성적을 냈기 때문에 앞으로 4년 뒤엔 또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지금은 상상이 잘 가지 않습니다.” ― 2014년 소치부터 평창, 베이징까지 세 번의 올림픽에 참가했습니다. 가장 재밌었던 올림픽은 언제입니까? “이번 베이징올림픽인 것 같아요. 메달을 땄을 때보다 이번에 느꼈던, 어떤 감정들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너무 좋았고 더 기억에 남을 거 같아요. 많은 분들이 이제 진실을 알아주셨고, 저를 응원해주신 게 가장 크게 남는 거 같아요.” ― 이제 4년 전의 아픈 기억은 다 털어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글쎄요, 그런데 상처는 흔적으로 남긴 남으니까 없어지지는 않겠지요. 그래도 잘 아물어가는 중이라고 생각해요.” ― 오해가 풀리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아쉬움은 없습니까? “이제라도 이렇게 밝혀졌으니까 다행이죠. 사실 저는 평생을 가지고 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도 괜찮아요, 이제 다시 운동하면 되니까요.”   박찬수 기자 pcs@hani.co.kr

2022.03.02

4년전 ‘왕따 논란’ 이겨낸 김보름 “응원받으니 스케이트 재미있어”

“원래 경기할 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편이에요. 근데 이번 올림픽을 치르면서 즐길 수 있게 됐어요.” 김보름(29·강원도청)은 지난달 19일 베이징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매스스타트 5위에 오른 후 21일 귀국했다. 25일부턴 동계체전에 나서 3000m와 1500m, 팀 추월 3관왕에 올랐다. 빡빡한 일정에 피곤할 법도 한데 28일 만난 김보름의 표정은 밝았다. 그는 “개인 최고 기록엔 조금 못 미치지만, 동계체전에서 평창 올림픽 이후 가장 빨랐다. 요즘 스케이트에 재미가 너무 붙은 것 같다”며 웃었다. “응원을 많이 받으니깐 좋은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어서 더 그런 것 같아요.” 김보름은 4년 전 평창에서 눈물을 흘렸다. 팀 추월 경기에서 선배 노선영(33·은퇴)을 따돌렸다고 비난받았다. 그의 선수 자격을 박탈하라는 청와대 국민 청원이 60만명에 달했다. 군중 심리를 등에 업은 각계 인사들도 한마디씩 했다. 정부가 ‘왕따 주행’이 없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는데도 주홍글씨는 지워지지 않았다. 정신적 충격으로 병원 치료도 받았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표현할 말조차 생각나지 않아요. 제 말을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죠.” 사람을 만나는 게 힘들고 말수도 줄었다. 그는 “한 사람이 감당하기엔 큰 고통”이라며 “이런 일이 반복돼선 안 된다”고 했다. 가족과 지인들의 응원으로 간신히 버텼다. 2020년 손해배상 소송을 냈고, 최근 1심은 “노선영은 김보름에게 위자료 3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김보름은 “진실은 언젠가 밝혀진다고 믿고 법원에 갔다. 1심 이후 많은 사람이 사실을 알게 돼 다행”이라고 했다. “제가 포기하지 않은 모습을 보고 용기를 얻었다는 말을 듣고 힘이 났어요. ‘누군가 나를 보는구나’라고 생각했죠.” 김보름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과거 자신을 비난한 것에 대해 사과하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미안하다는 분들에게 너무 감사해요. 조금씩 상처가 치유되는 느낌이 들거든요.” 김보름은 올림픽을 세 차례 치렀다. 첫 올림픽 2014 소치는 “좋은 선수로 성장하는 발판”이었다. 2018 평창은 “너무나 좋으면서도 힘든 순간”이었다. 매스스타트에서 첫 올림픽 메달(은)을 땄지만, 팀 추월 경기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 2022 베이징은 “너무 행복했다”고 했다. 상처를 딛고 일어섰고 생각지 못한 응원도 많이 받았다. 아쉬움도 있다. 경기 막판 선두권으로 올라서고도 상대 선수와 접촉하면서 스퍼트를 끝까지 올리지 못해 메달을 못 땄다. “약간의 실수가 있었다”며 “100점 만점에 75점”이라고 했다. 김보름은 동계체전을 끝으로 올 시즌을 마무리했다. 4년 후 올림픽 도전에 대해선 여지를 남겼다. 그는 “평창 이후 스케이트를 그만두겠다고 생각했는데 베이징에 갔다. 4년 동안 무슨 일이 있을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우선 한 해 한 해 최선을 다해 보내고 싶어요. 그러면 다음 올림픽도 금방 다가오겠죠.”   송원형 기자 swhyung@chosun.com

2022.02.28

양준혁야구재단, '최형우와 함께하는 BASEBALL CAMP' 개최

기아타이거즈 최형우 선수가 2017년 12월 10일, 모교인 전주 진북초등학교에서 열린 야구 교실에 참석했다. 최형우 선수 외에도 ‘양준혁 야구재단’의 양준혁 이사장은 물론 김세현, 나지완, 김민식(이상 기아타이거즈), 박정권, 박정배, 박재상 코치(이상 SK와이번즈 ), 장원삼, 손주인, 김상수(이상 삼성라이온즈 )등 10여명의 전·현직 프로야구 선수가 일일 코치로 동참해 재능기부를 했다. 전라도 지역 5개 초등학교(군산 중앙초, 군산 신풍초, 군산 남초, 전주 진북초, 여수초)에서 약 150명의 야구부원들이 참가하여 TV에서만 보던 프로야구 선수들에게 지도를 받았다.  최형우 선수는 FA 계약 이전에도 진북초등학교는 물론 전주동중, 전주고 등 모교 야구부에 후원금 및 야구장비를 전달해왔다. 지난해 초에는 ‘양준혁 야구재단’에 2억원의 야구발전기금을 전달했고, 올해 양준혁 이사장은 이 기금을 토대로 경기도 이천과 가평에서 최형우의 이름을 딴 전국 규모의 초등학교 야구대회를 개최했다. 최형우 선수는 어릴 때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 힘들게 야구를 했었다. 최형우 선수는 “야구 재능이 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운 선수들은 더 돕고 싶다”면서 “예전엔 내 앞가림하기도 바빴는데, 이렇게 누군가에 도움을 줄 수 있어서 보람 있고 뿌듯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2017.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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